독특한 제목의 편지 한 통이 집 우편함에 도착했다.
What a DAM shame.
대개 홍보나 광고용 스팸들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마련인데, 노란 바탕에 큼지막한 볼드체로 문구가
새겨진 이 편지는 버리기에 앞서 유머러스한 제목 때문인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개봉을 했더니 역시나 홍보용 전단과 도네이션을 위한 회신봉투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뭐 별 고민없이 전단지들과 회신봉투를 휴지통에 던져버린 후, 총 두 장, 네 페이지에 걸쳐 메시지를 가득 담은
편지지마저 버리려는데 내용 중에 그어진 밑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즉시 진짜 볼펜으로 그은 것일까하는 호기심이 유심히 편지지를 바라보게 하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그곳을 문질러 잉크가 묻어나는지, 자국이 패여있는지까지 확인했다.
이것은 페이크다.
편지 수신인의 주목을 끌기위해 일부러 이런 상태로 인쇄를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 단체의 의도가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적중한 셈이다. 이후 자연스럽게 나의 눈은 편지의 내용으로 옮아갔다.
물론 처음부터 4페이지나 되는 글을 다 읽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메시지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오래된 댐을 없애고 강을 살리자'는 것이다.
2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미국 전역에 셀 수 없을만큼 많은 댐들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 수명을 다하면서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거나 흉물이 되어버린 댐들을 철거함으로써 자연의 일부인 강을 수달이나 연어같이 그곳에 서식하는
동물들에게 돌려줌과 동시에, 잘못 지어진 댐으로 인한 홍수나 익사사고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길게 이어진 강을
따라 마음껏 카약이나 카누를 즐길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되찾자는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레 국민 대다수가 원하지 않는 운하를 위해 멀쩡한 국토와 함께 내 속마저 뒤집어대는 우리 정부의 갑갑스런
짓거리가 떠오르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작년 1월이던가, 공항으로 향하던 차창으로 아침안개 속에 신비롭게 자리한 습지를 지나쳤다.
마른 갈대 숲 속을 날아오르던 백로와 겨울 철새들의 모습이 그 풍경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한참을 바라보다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이란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받고 있는데, 어라! 채 몇 백 미터를 못 간 지점에서
새들만큼이나 부지런히 이른 아침부터 강바닥을 파올리며 습지를 향해 진군하는 대규모 공사현장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친히 우리의 MB께서 참석하여 극비리에 진행된 경인운하, 일명 '경인아라뱃길' 착공식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해괴한 공사현장을 '지구를 두 개로 쪼개려는 시도'쯤으로 생각할 뻔 했다.
애초부터 얕은 강을 큰 배들이 지나다녀야 한다는 이유로 한국판 그랜드 캐년으로 만들고 있었으니 이게 무슨
녹색성장이냔 말이다. 그로부터 벌써 일년이 넘었으니 그 아름답던 습지는 이미 제 모습을 잃었을테고, 백로나
철새와 달리 날개도 없이 태어난 무수한 생명들은 이내 흙과 함께 뒤섞여 땅 속 깊이 묻혔을 것이다.
미국 역시 과거에는 자연에 대한 존중의 부족으로 이기적인 인간의 건설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지만 지금은
마을에 댐 하나를 건설하는 것에도 마을 구성원은 물론이고 생태계, 환경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건설에 따른
영향력을 다각도로 살핀 후에 결정하기 마련인데, 선진국과 함께 21세기를 이끈다는 높은 긍지의 OECD 가입국가인
대한민국이 어쩌면 이렇게도 유행에 뒤쳐질까 싶다.
다시 돌아와서, 발신처인 American Rivers는 1973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미국 내 강들을 깨끗하게 살리고
지켜내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댐 철거 운동' 역시 이 단체의 여려 활동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제는 철거도 건설만큼이나 어려워 그에 따를 영향을 두고 시와 주민을 상대로 논의, 설득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 단체에 소속된 각 분야의 환경전문가들이 나서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단체의 운영을 위한 자금마련으로, 그들이 오늘 편지를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 기부금액으로 $15을 정해놓고 있는데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것인지 몰라도 정기적인 기부에 대한
언급은 편지나 홍보물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 의아했다. 더불어 $15 이상을 기부하면 여러가지 선물을 주는데
'Go with the FLOW'라는 문구가 적힌 반팔상의와 함께 Roger라는 이름의 30센티미터 길이의 수달 인형을 보낸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름다운 강의 사진을 담은 달력과 잡지 그리고 맴버쉽 카드까지 말이다.
미국 물가를 감안할 때 선물값만 따져도 소매가로 $15 이상일 듯 싶은데, 이렇게 얼마 남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을
하는지 또 다시 의아했다. 한번 도네이션을 시작한 기부자는 그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표현일까?
결국 4페이지 분량도 모자라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던 홍보물까지 꺼내어 모든 글들을 다 읽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그곳의 글들과 동영상까지 골고루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정이, 일회적으로 기부를 해 보자는 것이다.
내 마음을 움직인 그들의 노력을 찬사하는 편지를 함께 넣어서.
작년 여름에 이어 올 여름도 북부 뉴욕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그럴때마다 항상 강이 있는 곳에 머물다오는데 생각해보니 강은 내게 주는 것이 많은데,
정작 나는 강에게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거 같아 이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댐을 없애는 것이 강을 위한 것이라면 이렇게 은혜를 값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기부의 가장 큰 이유일 것 같다.
수달 로저 인형이 그 다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