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단소리2009. 5. 19. 06:38

일년에 한번씩은 박원순 변호사님을 뉴욕에서 뵙곤 하는데 늘 바쁜 일정으로 오시는 터라,
여러 사람들과 자리를 하다보면 정작 박변호사님과 나누는 개인적인 시간은 채 몇분이 되지 않을 뿐더러 상투적인
인사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대화의 내용이 없기가 부지기수다.

그러던 차, 지난 4월에 박변호사님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신영희님으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게되었다.
박변호사님이 5월 중순 경에 뉴욕을 방문하려는데 꼭 가봐야할 곳이 있다면 하루 스케줄을 비워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뭐 이런저런 고민없이 일단 그러겠노라는 회답을 즉시 보내긴 했는데 정작 어디를 가야할 지, 또 무엇을 해야할지 슬슬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소셜 디자이너'라는 박변호사님의 새 직함을 염두에 두면 볼 거리도 많고 이것저것 배워갈 것도 많은 맨하튼이 하루 일정을 보내기엔 적격의 장소일테지만, 매년 뉴욕을 방문하시는 분이라 이미 내가 아는 것들을 꽤뚫고 계실거라는 막연한 짐작에 별 논의없이 뉴욕의 거대한 섬, 롱아일랜드 여행을 제안해버렸다.

하지만 장소를 정하고 나니 이제는 무엇을 할 지가 더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든 생각은 매번 빠듯한 스케줄로 사람들을 만나고 기관을 방문하고 각종 행사를 치르시느라 분주하신 분이니 하루 정도는 아무 고민없이 몸과 마음을 편하게 뉘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이런 나의 생각이 철저히 틀렸음은 박변호사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5월 16일 토요일, 아침 미팅을 마친 변호사님을 모시고 아내와 나는 롱아일랜드로 차를 향했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잔뜩 찌뿌린 날씨라 괜스레 초조함도 일었지만, 어디 마음 불편한 사람과 화창한 날을 보내는 것과 바꿀 수 있을까. 달리는 차안에서 간략하게 방문할 곳을 표시한 지도를 변호사님께 보여드리고, 한 시간 남짓 달려 첫번째 목적지인 Robert Moses' beach에 도착을 했다.

날씨 탓인지 대서양을 내다보는 바닷가의 바람이 꽤나 쌀쌀하게 불어댔고 안개마저 자욱해 Fire Island의 멋진 풍광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멋진 자연 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리라는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것은 비단 기대감 뿐만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박변호사님께 바쁜 일정 속에 꿀맛같은 하루를 마련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나의 예상도 기대감과 함께 철저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개 바닷가에 오면 탁 트인 바다와 백사장을 보기 위해 한달음에 내달리는데, 뒤따라 오시던 박변호사님이 느닷없이 식수대의 버튼을 누르고 계셨다. '아, 내가 출발해서 지금까지 물 한모금 드리지 않았구나!'하며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는데, 박변호사님은 겸연쩍게 웃으시면서 "아, 물이 잘 나오네요. 대개 한국에 있는 공공시설에 가면 식수대에 물이 안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하시고는 사진기를 꺼내어 한 손으로는 버튼을 누른 채, 다른 한 손으로 식수가 나오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쩔쩔 매신다. 그제서야 달려가 내가 식수대 버튼을 대신 눌러드렸다.

아! 이분은 원래 이런 분이셨다.
일반적인 관점으론 휴식은 휴식이고 일은 일이다. 그리고 일 자체가 휴식인 일명 '워커홀릭' 부류의 사람도 있다.
박변호사님의 경우에는 일과 휴식의 경계가 아예없는 부류에 속한다.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삶 자체가 그냥 휴식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5년을 넘게 박변호사님을 보면서도 이분이 어떤 분인지 잊고있는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모처럼 한국을 방문해서 건강을 챙기시라고 영양제 한통을 내민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와 비슷한 창피함을 맛 본 적이 있었다.

변호사님의 남다른 관찰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지역 곳곳의 간판과 역사적 기록이 담긴 사인 그리고 조그만 동네의 Yard Sale을 알리는 전단지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라면 달리는 차에서라도 모조리 카메라에 담았다. 만약 롱아일랜드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사진기가 있다면 개의치 않고 어깨에라도 짊어질 기세였다.

이쯤되니 나의 여행계획이 그 시작부터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변호사님의 이런 모습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부분적으로 개발과 보존, 그리고 유지의 관점에서 여행 계획을 짜긴했지만, 그러자면 롱아일랜드 전체를 둘러보기에는 하루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차라리 맨하튼을 걸으며 내가 아는 곳들을 소개해드리는게 더욱 나았을 일이다. 변호사님께는 센트럴 파크나 리버사이드 파크만해도 엄청난 보고가 되었을텐데 말이다.

- Robert Moses Beach
  바닷가 식수대사구(Sand Dune) 보호대 / 백사장의 검은모래 / 바닷가 돌맹이 하나 / 비치 매점 실내 / 
  Fire Island 안내판 /
기름 드럼 쓰레기통
- Gardiner County Park
  오피스 건물 / 공원 안내도 / 게시판 / 피크닉 테이블 / 놀이터 / 공원 벤치 / 바닷가 인접 늪지대 / 갈대숲 / 수로
- Bay Shore
  마을 상징 깃발 / 아이스크림집 간판 / 마을 번화가 거리
Sayville
  Yard Sale 안내 전단 / 벼룩시장 물품들 / 벼룩시장 스테프 / 타운 내 교육감 선거 벽보 / 아이들의 카워싱 세일
-
Martha Clala Vineyards
  이정표 / 와인농장 풍경 / 와인 시음장 / 와인 기프트샵 / 와인 까페 / 롱아일랜드 와이너리 투어 팜플렛
- 시골 농장
  판매용 각종 꽃 화분 / 와인 시음장 메뉴판 / 와인 판매대
- Greenport
  Orient Point 이정표 / 회전목마 / 타운 이정표 / 각종 상점 / 상점 간판
-
Greepot -> Shelter Island 행 선박
  선박 내 승객실 / 선박 / 쉘터 아일랜드 역사 정보 간판

내 기억을 더듬어 그날 박변호사님이 관심을 둔 것들과 사진기에 담은 것들을 한번 나열해 봤다.
주로 사람들이 풍경이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사진을 찍곤하는데, 변호사님이 그날 카메라에 담은 풍경사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고 인물 사진이라고는 나와 아내와 번갈아 함께 찍은 두 장이 전부니, 변호사님의 주 관심사가 어떠한지는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후 갑자기 잡힌 변호사님의 저녁 약속으로 Montauk 방문과 East Hampton에서의 저녁식사를 뒤로한 채 맨하튼으로 돌아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변호사님과 헤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고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기고 하루종일 운전을 한터라 나름 고되었던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어 다음 날 늦은 아침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비몽사몽거리며 앉았는데, 차 안에서 변호사님이 건네주신 최근 집필작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몇 년간 전국순례를 하며 무언가를 준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노력의 결과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것이다.

몇 개의 챕터를 읽어나가는데 차안에서 나눠 주시던 말씀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다시 책을 덮어 표지의 사진을 보는데 마치 돌맹이 하나를 잔잔한 호수에 던진 것처럼, 사찰의 큰 종을 울린 것처럼
변호사님의 음성과 느낌이 내 귓전과 마음을 울린다. 바로 어제인데도 그 울림이 참으로 눈물나게 그립고 소중스러웠다. 그 기분을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법정스님의 책에 그런 비슷한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찾아봤더니 이런 시가 있다.


그리운 사람 / 법정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전에도 그런 울림이 있는 사람이 있었냐고 묻는 아내에게 없다고 말했다. (아내라고 말할 걸...)
단순히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 적은 사춘기 이후 여러번 앓았지만, 조용하게 게으른 나를 꾸짖어 반성하게 하며 무엇을 닮은 삶을 살 것인지까지 소리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울림은 난생처음이고, 그런 울림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도 하지만 아무리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분해하고 계산하다해도 해결될 것 같진 않고 그저 내 영혼을 울리는 사람이 있으니 그걸로도 참 다행스런 삶을 살고있다, 나라는 사람은.




덧붙이는 글 >
얘기만 듣다 오늘 처음 원순닷컴을 방문해 보니 짧은 며칠 동안 뉴욕을 다니시면서 여러 글을 올려놓으셨다.
아마도 호텔에 들어가셔서 낮에 찍은 사진을 올리고 관련한 글을 써 올리신듯 한데, 어쩌면 하나같이 내가 잘 알고있고 좋아하는 곳들과 내용들이다. 진작에 이 사이트를 들렀더라면 롱아일랜드를 제쳐두고 이런 곳들만 골라서 다녔으면 좋았을 것을. 언제 한번 오랜 시간을 비워 박변호사님과 뉴욕을 돌아다닌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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